위대한 개츠비
나는 개츠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고전으로 많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읽고 내가 별로 감명을 느끼지 못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좋아하지 않았다. 개츠비는 그런 책 가운데 하나였다. 그건 김영하가 역자의 말에 써 놓은 바로 고등학생의 심정과도 같았다.
시내의 대형서점에서 두 고등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영미 번역소설 서가 근처에 있던 이들은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욕에 가까웠다. 이거 읽어봤냐, 읽어봤다, 어땠냐, 너무 재미없더라는 얘기를 그 또래 특유의 거친 부사를 섞어(예를 들어 '졸라') 떠들고 있었다... 그런 비난은 터무니없다는 반감이 들었다.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인들이 즐겨 주장하는 것처럼, '지금까지 영어로 씌어진 최고의 소설'은 아닐지도 모른다. 상투적인 로맨스 소설의 얼개를 가지고 있으며 작가와 동시대에 어울려 자웅을 겨루던 모더니즘 소설의 대가들이 도달한 지점에는 못 미치는 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등학생들이 말하는 것처럼 '졸라 재미없는' 소설은 결코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 中 역자의 말, 김영하]
김영하의 말을 믿어서였을까. 나는 번역이 보다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 민음사(김욱동)와 열림원(김석희)를 두고 김영하의 책을 집어들었다.
<위대한 개츠비> 밑줄 긋기
웨스트에그
내가 북비 대륙에서 가장 이상한 동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집을 얻은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집은 뉴욕에서 정동쪽으로 뻗어나간, 시끌벅적하고 길쭉한 섬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섬엔 자연의 신비라 할 만한 기이하게 생긴 두 지역이 있었다. 거대한 달걀 모양의 이 두 지역은 뉴욕으로부터 20마일쯤 떨어져 있었고, 외형은 서로 비슷했다. 만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작은 만을 사이에 둔 채 서반구의 바닷물 중에서도 인간의 손길이 가장 많이 닿은 거대한 롱아일랜드 해협의 앞마당 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완벽한 타원형은 아니고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접촉면이 납작하다. 생김새가 너무 닮아서 하늘의 갈매기들도 헷갈릴 지경이다. 날개가 없는 것들은 그 두 지역이 모양과 크기 말고는 전혀 닮은 게 없다는 점에 더 흥미를 느낀다.
화자는 웨스트에그에 살았다.그의 옆집에는 개츠비가 살았다. 그리고 이스트에그에는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 톰 뷰캐넌 부부가 살았다.
데이지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앞쪽으로 살짝 기울여 백치미가 흐르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 역시 미소로 화답하며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너무 행복해서 몸이 마, 마비돼버렸어."
그녀는 대단히 재치 있는 말을 했다는 듯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이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귓속말로, 턱으로 균형을 잡고 있는 여자의 이름이 베이커라고 속삭였다(데이지가 귓속말을 하는 건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말도 안 되는 험담이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그 귓속말의 매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데이지에 대한 인물 묘사가 짧고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만 보고도 나는 내가 데이지란 인물을 좋아할지 좋아하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개츠비에 나오는 인물들은 세속적이다. 2장 아파트에서 톰과 톰의 정부인 머틀(윌슨 부인), 그녀의 여동생 캐서린, 매키, 매키의 아내와 보내는 시간들은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파티
3장은 개츠비 집의 파티를 묘사하며 시작한다. 개츠비 집에서 벌어지는 파티는 굉장히 호화롭고, 사치스러웠다.
여름 내내 밤이면 밤마다 옆집에선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개츠비의 푸른 정원은 속삭임과 샴페인 그리고 별빛으로 가득 찼고, 남자와 여자들이 그 사이를 부나비처럼 오갔다. 오후 만조 때가되면 그의 손님들이 잔교 꼭대기에서 바다로 다이빙을 하거나 해변의 뜨거운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했다. 그럴 때면 그의 모터보트 두 대가 물거품 위로 수상스키를 끌고 다니며 해협의 물살을 갈랐다. 주말마다 그의 롤스로이스는 셔틀버스가 되어 아침 아홉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시내에서 파티 손님들을 실어날랐고, 그의 스테이션왜건은 기차로 오는 손님들을 태우고 노란 딱정벌레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특별 채용한 정원사를 포함한 여덟 명의 하인들이 하루 종일 걸레, 솔, 망치, 전지가위 등을 들고 지난밤 부서져나간 것들을 열심히 손보았다.
매주 금요일에는 뉴욕의 과일 가게에서 다섯 상자의 오렌지와 레몬이 배달되었다. 월요일이 되면 알맹이 없는 반쪽짜리 껍질들만 뒷문 앞에 잔뜩 쌓여 피라미드를 이루었다. 주방에 있는 기계는 집사가 버튼을 이백 번만 누르면 삼십 분 안에 이백 잔의 오렌지 주스를 뽑아냈다.
재회
개츠비가 데이지를 5년만에 다시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피츠제럴드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는 그의 빛나는 문장 하나 하나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나를 힐끔 보았는데, 애써 웃음 지으려던 입은 그대로 벌어져 있었다. 다행히도 벽시계가 그의 머리 때문에 위험할 정도로 기우는 바람에 그는 돌아서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경직된 자세로 자리에 앉아서 팔꿈치를 소파에 올려놓고는 손으로 턱을 고였다.
"시계 때문에 미안해." 그가 말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말 중에서 공통의 화제가 될 어떤 것도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오래된 건데 뭐." 나는 바보처럼 말했다.
아주 잠시, 우리 셋 모두 그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기라도 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빗줄기는 그들의 속삭임처럼 감정의 기복에 맞춰 때때로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대지가 완전한 침묵에 잠기자 집에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부엌에서 스토브를 밀어 넘어뜨리지만 않았다 뿐,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소음을 낸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데이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내 생각에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보이는 반응에 따라 그 집의 모든 것들의 가치를 재산정할 작정인 것 같았다.
작별인사를 하러 간 순간, 나는 개츠비의 얼굴에 다시 돌아온 당혹스러움을 발견하였다. 현재의 행복에 대한 희미한 의심이 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돌아보면 거의 오 년의 세월이었다. 그날 오후만 해도, 눈앞의 데이지가 그가 꿈꾸어왔던 데이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오래도록 품어왔던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환상의 생생함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를 넘어서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는 독보적인 열정을 가지고 그 환상 속에 뛰어들어, 하루하루 그것을 부풀리고 자신의 길에 날리는 온갖 밝은 깃털로 장식해왔던 것이다. 아무리 큰 불도, 그 어떤 생생함도, 한 남자가 자신의 고독한 영혼에 쌓아올린 것에 견줄 수 없다.
매력적인 문장들 ,인물에 대한 세심한 묘사는 소설을 읽는 재미를 주었지만, 결말이 주는 단순함과 실망감 때문에 소설을 좋아할 수만은 없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다시 읽은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김영하의 번역이 소설을 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