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Books

[읽다] 테드 창, 숨

_물곰 2019. 9. 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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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책,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의 책이 국내에 처음 번역된 때는 2004년 11월 입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김상훈 번역으로 '행복한책읽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 2008년 6월 초판 6쇄를 찍고, 2008년 12월 개정판 1쇄를 찍었습니다. 제가 가진 책은 2011년 7월에 개정판 5쇄로 나온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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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꾸준히 팔리는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반응도 좋았습니다. 교보문고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알라딘,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시사저널 선정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지금은 절판되고, 북하우스 브랜드 '엘리'에서 김상훈 번역 그대로 2016년 10월 재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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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책,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테드 창 소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출간된 소설은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 (2010년) 입니다. 우리나라에선 북스피어 출판사가 2013년 8월에 출간했습니다. 

전직 동물원 조련사인 애나가 신생 게임 회사에 취직해 가상 애완 동물, 디지언트를 교육시키는 역할을 맡습니다. 테드 창의 다른 소설과 같이, 아주 새롭지는 않은 SF 장치를 이용해, 발생 가능한 다양한 사건들과 인간의 심리를 밀도 있게 펼칩니다. 

중편 분량이라 이와 같이 한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으나, 이후 엘리 출판사에서 출간된 <숨>에 하나의 작품으로 다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북스피어에서 출간된 책은 절판되었고요.

번역은 동일하게 김상훈이 맡았습니다. 테드 창 이름으로 국내 출간된 책 전부, 김상훈이 번역했습니다.

 

세번째 책, 숨

테드 창의 소설에는 다양한 SF 장치들이 나온다. 새로운 느낌의 장치도 있고, 이미 다른 SF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접해 더이상 새롭지 않은 장치도 있지만, 이러한 장치를 시작으로 소설을 풀어 나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테드 창의 소설은 숨막히는 듯한 몰입감이나 긴장감은 없지만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다 어느 순간, 쿵 하는 느낌의 물음을 던져주거나 울림을 주는 지점이 있다. 단편에 담김 장치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책 첫번째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는 ‘시간의 문’이 등장한다. 시간의 문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이다. 초 단위의 문도 있고, 이십 년 단위의 문도 있다. ‘초의 문’은 장치를 설명하기 위해 잠깐 등장하고, 소설의 주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이십년의 시간을 연결한 ‘세월의 문’이다.

문을 처음 소개하는 ‘바샤라트’는 문의 제작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현실의 피막에는 마치 나무에 난 벌레구멍 같은 미세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그 구멍을 찾아내면, 유리 직공이 녹인 유리 덩어리를 잡아끌어 목이 긴 파이프로 바꾸듯이, 그 구멍을 넓혀 길게 끌어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한쪽 부리의 시간을 마치 물처럼 흐르게 하고, 반대쪽 부리에서는 그것을 시럽처럼 걸쭉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바샤라트의 얘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말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그저 이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로 경이로운 것을 만들어내셨군요.”

소설은 이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기록을 담는다. '행운을 만난 밧줄 직공의 이야기', '자기 것을 훔친 직조공 이야기', '아내와 그녀의 연인에 관한 이야기' 이 이야기들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세월의 문'을 이용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좋은 점, 좋지 않은 점 등을 담아내는 용도로 이용된다.

타임머신

현재까지 과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설명할 수 있는 타임머신은 단 하나 뿐이다.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달려 시간 지연 효과를 이용해 미래로 이동하는 것이다. 다시 과거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타임라인은 오직 하나다. 미래로 간다고 미래에 사는 또 다른 ‘나’를 만날 일은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에 들어갔다 나오는 장면, 밀러 행성을 다녀오는 장면을 통해 접한 타임머신이다. (타임머신이라는 기구는 없다)

인터스텔라의 과학자문을 맡은 사람은 ‘킵 손’ 교수였다. 라이고의 중력파 발견에 기여한 공로로 201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킵 손 교수.

테드 창은 1990년대 중반 물리학자 킵 손이 강연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킵 손 교수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틀 안에서 과학적 이론을 통해 타임머신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으로 우리는 타임머신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곧잘 탈것 내지는 다른 시대로 전송해주는 일종의 순간이동 장치를 떠올린다. 그러나 킵 손이 묘사한 타임머신은 한 쌍의 문에 가까웠고, 한쪽 문으로 들어가거나 거기서 나오는 물체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다른 문에서 나오거나 거기로 들어가는 식으로 가능했다.

과학적 이론으로는 타임머신을 이용해 과거로 가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과거로 여행하는 데에는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다. 과거에 있는 다른 ‘나’를 만나는 것이라든지, 과거를 바꾸었을 때 자신이 출발해 온 시대가 바뀌는지, 바뀌지 않는지. 자신이 온 시대가 바뀌지 않는다면 다른 멀티 유니버스처럼 세상이 나뉘어 다른 미래로 분기하는지 등등.

테드 창은 과거와 미래로 여행은 가능하지만 바꾸지는 못하는, 모든 것이 순환하는 이야기 구조를 그의 작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담았다. 이러한 순환하는 이야기 구조는 그 자체로서는 완결성을 지니지만, 시작과 끝이 없어야 한다. 오직 순환 구조로서만 존재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

미국의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는 2012년 출간한 <자유의지는 없다>에서 자유의지는 환상이며 우리의 의지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뇌가 매 순간 처리하는 정보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인식할 뿐”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으며, 인간의 뇌가 우리가 무엇을 할지 이미 결정해놓았음이 밝혀졌다. 실험에 따르면 이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80퍼센트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도 있다고 한다.

테드 창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이를 짧은 소설로 만들어낸다.

‘예측기’라는 장치가 있는데, 버튼을 누르려고 마음 먹으면 1초 전에 불빛이 반짝인다. 누르려고 하지 않으면 반짝이지 않는다. 불빛이 반짝이기 전에 버튼을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측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며칠 동안 강박적으로 이것을 가지고 논다.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이 기계의 맹점을 공략해보려고 다양한 책략을 시도한다. 그런 뒤 관심을 잃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예측기가 의미하는 바를 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사자는 향후 몇 주에 걸쳐 변경 불가능한 미래의 의미를 실감한다. 일부는, 자신들의 선택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택 행위 자체를 거부한다.

결국 예측기를 조작해본 사람들의 3분의 1은 입원 조치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메시지 자체가 ‘예측기’와 동일한 원리를 이용해 1년 뒤의 미래에서 오는 메시지라는 점이다. 그리고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끝 맺는다.

나의 메시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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