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산mountain

인왕산을 기록하다

_물곰 2020. 12. 2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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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사찰

   인왕사

   국사당

   송림사

   석굴암

- 바위

   선바위

   범바위

   모자바위(장군바위, 강아지바위)

   치마바위

   기차바위

   매바위

- 계곡

   수성동 계곡

- 식생

   소나무

- 문화유적

   필운대

   황학정

- 인물

   강감찬

   윤동주

   이항복

- 주변환경

   인왕산 서쪽

   인왕산 북쪽(상명대학)

   인왕산 북동쪽(부암동)

   인왕산 남동쪽(서촌, 사직공원, 경복궁역)

   인왕산 남서쪽(행촌동, 무악동)

 

   

인왕산과 인왕사는 세종 때 이름 지어졌다

인왕사

소재지 : 서울시 종로구 통일로 18가길 26

조선왕조실록에 태조가 인왕사에서 조생 스님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의 후원으로 늦어도 1397년에는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주는 무학대사와 조생선사이며 매월 초하루 보름마다 내원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강설은 호국인왕금강반야바라밀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세종 때는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명칭을 인왕산이라 칭하고 사찰을 인왕사라 부르게 되었으나, 연산군 때 궁궐이 보인다하여 복세암과 금강굴과 함께 인왕사도 폐사되었다. 그 후 복원되어 상당기간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폐사지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10년경 선바위를 중심으로 박선묵 거사가 선암정사(禪巖精舍)를 지어 서옹(西翁), 탄옹, 자인(慈仁), 대원(大園)스님 등이 뒤를 이었으며 대원암(大願庵), 보광전, 관음전, 극락전을 짓고 수도 정진하였다. 1942년에는 조계종 봉은사 말사로 편입되었고, 1977년에는 인왕사 내 5개 전각과 토지가 인왕사에 증여되어 1988년에 전통사찰 인왕사로 문광부에 지정등록되었다.

 

상고역사실록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인왕산과 선바위가 왕기가 서리는 길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민족 신앙의 대상이자 약일억오천만년전 생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선바위 천년을 이어온 한민족 정신의 뿌리로서, 기도 정진하는 자는 소원을 이룬다는 일명 '소원바위, 선바위'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조선신궁에 밀려 인왕산으로 옮겨진 국사당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28호

시대 : 조선 후기(추정) / 1925년 이건(建)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무악동 산 2-12번지

이 사당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木寬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경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이곳은 나중에 굿당으로 변하였는데, 헌종 대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雲散稿)란 책에는 국사당이란 명칭과 함께 현존하는 무신도의 기록이 있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 지었다. 자연 암반 위에 아담한 맞배집을 세웠다. 본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옮긴 뒤에 양쪽에 한 칸씩을 첨가하여 5칸이 되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관청에 소속된 장인(匠人) 간결한 솜씨를 보여주는데, 명확한 건립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 17호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는데 솜씨가 다른 무신도에 비해 뛰어나다. 지금도 이곳 국사당을 무대로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같은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사당 뒤로는 무학대사 또는 태조 부부의 모습이란 전설이 깃든 선바위(서울특별시 민속자료 4) 있고, 암자도 여럿 있어 명당 인왕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진. 인왕산 국사당(2020년 11월 29일 촬영)

 

선바위는 일억오천만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추정

선바위, 선돌, 선암 등으로 불린다. 서 있는 모습 같아서 선바위인가 싶지만 참선하는 모습 같아 선바위라 한다. 서울의 도성을 정할 때 선바위를 기준으로 도성 안과 바깥을 나누었다는 설화가 있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정도전은 바깥으로 두자고 주장했다 한다. 결론은 도성 바깥.

 

신성한 대상물이 되고 있는 바위로, 마치 중이 장삼-검은 베로 만들어진 품과 소매가 넓은 중의 웃옷-을 입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불교의 ‘선(禪)’자를 따서 이와같이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쌓을 때 당시의 문신이었던 정도전과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느냐 성 밖에 두느냐로 크게 의견대립을 보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만일 이 바위를 성 안에 두면 불교가 왕성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문신들은 힘을 못쓰고, 성 밖에 두면 반대로 승려가 힘을 못쓰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결정을 못 내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눈이 녹지 않은 자리가 있어 태조는 이것을 성터라고 생각하였고 결국 바위는 성 밖으로 밀려났다 한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있는 자연석으로서, 직접적인 신앙대상물은 아니지만 불력(佛力)을 지닌 존재처럼 신성시 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또 다른 설화로는 서울의 명칭이 유래된 이야기다.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 도성 안으로 품자고 하고 정도전은 서울 도성 밖에 두자고 설전을 벌였다. 태조 이성계가 고민하다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 정도전과 나섰다. 그때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아 있고, 선바위에는 눈이 녹지 않아 선바위는 성 밖으로 남겨지게 됐다. 그런 이유로 서울 도성에 안과 밖이 생기게 됐다고 전해진다. ‘서울’이라는 지명은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서울이 됐다고 한다. (출처: 한국경제)

 

사진. 선바위(2020년 11월 29일 촬영)

선바위 뒷편에서 본 사진. 선바위 너머 인왕산 성곽이 보인다.

 

선바위 안내문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번지4호

이 바위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祈子岩)' 이라고불린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가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설화와 태조 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을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이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心神)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 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둘 수 있게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인왕산을 볼 때면 이 바위가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 초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도 나타난다.

 

위치도. 네이버맵에 화살표로 나오는 위치가 정확하게 맞다.

 

인왕산 모자바위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 모자바위 아래에선 기도를 드리는 터가 마련되어 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인왕산 군부대 아래에 있는 모자바위

 

 

바위 위에 올라가면 범바위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전망이 잘 나온다.

 

모자바위 위에서 바라본 풍경

 

모자바위 위에 올라가면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던 검은 바위도 보인다.

 

바위 아래에는 바위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도 나오고, 바위 사이로 서울 풍경을 볼 수 있다.

 

필운대

 

필운대(弼雲臺)는 조선 중기의 명신 이항복이 살던 곳으로 '필운'은 그의 호이다. 종로구 필운동의 배화여자고등학교 뒤뜰에는 큰 암벽이 있는데, 그 왼쪽에 "필운대(弼雲臺)"라는 정자(正字)가 크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시구(詩句)가 새겨져 있으며, 오른쪽에 10명의 인명이 나열되어 있다. 2000년 7월 15일 서울특별시의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3]되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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