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25일
단 '하나'의 작품으로
유럽문학의 '결정체'라는 평가를 받는 책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최근 민음사에서 2권까지 나왔다. (2016.2.현재 6권까지 나왔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하여 말하는 방법>에서 가장 길게 나왔던 책
읽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문득 읽고 싶어졌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떠들어 대
읽지 않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다. 다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미지라도 저자의 고유한 실체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연관들의 풍요로움"을 이용한다. 그의 저작들의 이점은 각각의 조각들에 있다. 그의 책은 우리가 원하는 어느 페이지에서도 펼치지 않고 읽을 수 있다. 그가 저술한 책의 활력은 결코 선행하지 않는 것, 즉 어떤 점에서는 '선취한 환상'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그 활력은 우리가 그의 텍스트의 조직 자체의 '고유한 활동'이라 명명할 수 있는 것에 연관되어 있다.
- 발레리
그러나 발레리가 프루스트의 책을 다 읽었을까? 다음의 글을 보자.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가운데 한 권 정도 겨우 아는 처지요, 이 소설가의 예술 역시 나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이긴 하지만, 그러나 나는 다행히 시간을 내어 읽어볼 수 있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약간의 내용만으로도 우리 문학이 최근 뛰어난 문인을 한 명 잃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의 죽음은 비단 우리 문학만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우리의 문학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이들이 구성하는 그 은밀한 사회로서도 참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강력하고 섬세한 작품에 대해 정확하고 깊이 있게 얘기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작품을 구상하여 영예를 누린 사람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년 전에 얼핏 그의 작품을 엿보았을 뿐이다. 내가 여기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글로 적힐 가치도 거의 없는, 힘없는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중 발레리의 글
2013년 12월 15일
* 2014년부터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불을 지폈다. 그는 1권을 다 읽고 2권을 읽는다고 했다. 플로베르를 좋아하는 친구였다. 나는 보바리 부인을 읽다 말았다. 어쩌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읽다 말지 모른다. 어쨌든 민음사에서 나온 <스완네 집 쪽으로> 1, 2권을 주문했다. 읽는다.
1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그러다 삼십여 분이 지나면 잠을 청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에 잠이 깨곤 했다. 그러면 나는 여전히 손에 들고 있다고 생각한 책을 내려놓으려 하고 촛불을 끄려고 했다. 나는 잠을 자면서도 방금 읽은 책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약간 특이한 형태로 나타났다. 마치 나 자신이 책에 나오는 성당, 사중주곡,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와 경쟁 관계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 믿음은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몇 초 더 지속되어 내 이성에 거슬리지는 않았지만, 내 눈을 비늘처럼 무겁게 짓눌러 촛불이 꺼진다는 사실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다 이 믿음은 윤회설에서 말하는 전생에 대한 상념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마들렌에 관한 구절
프루스트에 관한 메모
당신이 심리학자라면 이쯤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무엇이 먼저였을까?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무능력한 병자는 15년 동안이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이 속물의 삶을 살며 내면에서 우러나는 순수한 기쁨을 느꼈고, 그 쪽지들은 말하자면 고작 너무 빨리 끝나 버린 사교 놀이의 여운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화학자가 실험실로 향하듯이, 식물학자가 초지로 나가듯이 살롱에 가서 오직 하나뿐일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한 소재를 그러모았던 것일까? 그는 그냥 그런 척했을 뿐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을까? 시간을 허비하며 사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을까, 아니면 더 높은 차원의 다른 제국에서 보낸 염탐꾼이었을까? 그가 사교계를 기웃거린 이유는 단지 그것이 그의 쾌락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을까? 예의범절에 대한 이 말도 안 되는 열정이 그의 삶 자체이고 필수 불가결한 욕구였을까, 아니면 열정적인 한 분석가의 대단한 위장이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 <우정, 나의 종교>, 오지원 옮김, 유유
2014.0602. 펴냄
2016.0210. 여전히 1권을 읽고 있다
2017.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