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의 말
도시는 인간의 활동을 위한 도구다.
도시는 더 이상 이 기능을 제대로 다하지 못하고 있다. 쓸모가 없다. 도시는 인간의 몸을 소모시키고, 그 정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나날이 늘어 가는 도시의 무질서는 우리를 불쾌하게 만든다. 도시의 타락은 우리의 자존심을 해치고 품위를 깎아내린다.
도시는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와도 맞지 않는다. [도시계획]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중에서 믿는 것이 더 낫다.
행동하는 것과 와해되는 것 중에서 행동하는 것이 더 낫다. [도시계획]
르 코르뷔지에
르 코르뷔지에는 근대 건축의 거장으로, 스위스의 10프랑 지폐에 얼굴이 실려있기까지 하다. 그는 집을 사람이 살기 위한 기계라고 했다. 기계는 권력과 재력을 과시하거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건축물이나 도시계획에서 인간성이 결여된 기계성을 느끼곤 했다.
기계는 기하학에서 나온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모든 것들의 원리는 기하학적이다. 그 꿈을 기하학의 기쁨으로 정한다. 분석의 한 세기가 지난 뒤 현대의 예술과 사상은 우연이라는 사실 너머에서 찾고, 기하학이 그것을 점점 더 보편적 태도, 수학적 질서로 이끌어 간다. [도시계획]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창조가가 아닌 도시의 파괴자에 가깝다. 데카르트적인 합리성에 근거한 그는 수직적이며 밀도 높은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엔 '인간적'인 느낌이 부족하다. 그의 '합리성'은 너무 차갑다.
몇 년 뒤 도시계획에 관한 도판이 가득한 책을 넘기다가 내가 머물던 바로 그 동네-내가 묵던 호텔, 그 카페, 동네 세탁소, 신문가게, 심지어 국립도서관까지 다 포함하여-가 20세기의 가장 똑똑하고 영향력 있는 건축가 가운데 한 사람이 다이너마이트로 부수어 버리려던 구역에 들어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몽마르트의 낮은 언덕들이 있는 곳까지 체계적으로 커다란 공원을 조성하고, 거기에 드문드문 60층짜리 십자형 타워 18동을 박아넣을 생각이었다.
이 계획은 너무나 이상해 보였기 때문에 흥미를 자극했다. 나는 르 코르뷔지에가 자신의 (설계) 모델에 몸을 기댄 채 줄지어 선 그 지역의 의원과 사업가들에게 그것을 설명하는 사진을 발견했다. 그에게서는 꼬리나 뿔을 찾아볼 수 없었다. 똑똑하고 자비로워 보였다. 어떻게 이런 합리적인 사람이 파리 중심부의 반을 부수어버릴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한 뒤에야, 이 계획 뒤에 깔린 갈망을 공감하고 그 논리를 존중한 뒤에야, 한 도시의 미래에 관한 이 주목할 만한 개념을 조롱하는 것, 또는 정말로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당시 파리의 상황
1800년 파리에는 647,000명이 살았다. 1910년에는 3백만 명이 살았다.
아파트 건물의 처마 밑에서 몇 가족이 방 하나를 함께 쓰는 것도 다반사였다.
1900년에 파리의 가난한 지구에서는 보통 화장실 하나를 거주자 70명이 이용했다.
공장과 작업장이 거주지 한가운데 자리 잡고, 매연과 치명적인 폐수를 방출했다.
마당에서는 아이들이 더러운 하수를 뒤집어쓰고 놀았다.
콜레라와 결핵은 항상 위협적이었다.
거리는 밤낮없이 차량들 때문에 숨이 막혔다.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개조를 요구했다.
"기존의 중심부는 쓰러져야 한다. 모든 위대한 도시는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 중심을 재건해야 한다." 인구과밀의 부담을 덜기 위해 오래된 저층 건물들은 강화 콘크리트 기술의 발전 덕분에 최근에야 가능해진 새로운 종류의 구조물, 즉 마천루로 대치되어야 했다. "2,700명이 하나의 현관문을 사용하게 된다." 르 코르뷔지에는 탄성을 질렀다. 그는 훨씬 더 높은 타워, 무려 4만 명이 들어가 사는 건물을 상상하기도 했다.
위로 지어 올라가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인구과잉과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이었다. 타워에 모든 사람이 들어가 살 공간이 충분하다면 도시가 바깥으로 뻗어가며 시골을 삼킬 필요가 없을 터였다. "우리는 교외를 없애야 한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렇게 말했다.
동시에 르 코르뷔지에는 도시의 거리를 없앨 계획이었다. "우리의 거리는 이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거리란 낡은 개념이다. 거리 같은 것은 없애야 한다. 그것을 대신할 뭔가 다른 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는 차와 사람 양쪽의 정당한 요구가 늘 불필요하게 타협을 본다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이 둘을 나눌 것을 권했다. "어떤 보행자도 자동차를 절대, 절대 만나지 않을 것이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르 코르뷔지에의 '이상'으로 파리 외곽에 탄생한 주택단지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 '디스토피아적인 주택단지'들로 비판받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르 코르뷔지에는 2,699명의 이웃 가운데 불과 몇 명이 파티를 열거나 총을 사기로 결정했을 때 상황이 얼마나 까다로워질지 잊었다. 잿빛 하늘 밑에 강화 콘크리트가 얼마나 칙칙해 보일지 잊었다. 엘리베이터에 불이 났는데 집이 44층에 있을 경우 얼마나 답답할지 잊었다. 그는 또 슬럼가에는 싫어할 만한 것이 많이 있지만, 거리 계획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잊었다.
르 코르뷔지에는 자동차와 보행자를 구분하고 싶은 성급한 마음에 언뜻 보기에는 대조적인 이 두 세력 사이에 묘한 상호의존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지나쳤다. 자동차의 속도를 늦추어줄 보행자가 없으면 차는 너무 빨리 달려 운전자를 죽이기 쉬우며, 차의 눈이 자신을 비추지 않으면 보행자들은 왠지 약해지고 고립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는 점을 잊은 것이다. 우리는 차량과 군중이 까다롭지만 보람있는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뉴욕에 감탄한다.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르 코르뷔지에가 자동차와 보행자를 구분하고 싶어했던 이유는 그가 차가 다니는 길을 걸을 때마다 죽음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의 공백이 끝난 뒤, 교통의 횡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소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집을 나서서 터널을 지나면 갑자기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벗어날 수가 없다. 자동차가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20년 전, 학창시절이 생각난다. 도로는 우리들 것이었지. 도로 위에서 노래 부르고, 떠들고 놀기도 했지... 합승마차도 조용히 굴러갔고... 이제는 모두가 위협을 느낀다. 말이 나온 김에 더 이야기하자면, 몇년 전부터 이미 살아가는 기쁨(자신의 다리로 조용히 걷는 오래된 기쁨)을 잊었다. 날마다 도망다니고 쫓기는 짐승과 같은 태도에 빠져든다. (분명한 사실이다. 걸을 때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만약 여러분이 발을 헛디디면, 실수로 넘어진다고 상상한다면...)
르 코르뷔지에, <도시계획>, 정성현 옮김, 동녘
그는 '소극적인 치료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를 제안했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보행자와 자동차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은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보행자가 된다. (대부분의) 길은 차가 다니는 곳이기도 하고, 사람이 걷는 곳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건축
20세기를 지배한 모더니즘 건축은 '추상화'라는 특기로 경쟁한 건축 스타일이었습니다. '장식은 죄악'이라는 모토 외에도 '적을수록 좋다'는 캐치프레이즈도 있습니다. 이 추상화야말로 공업사회에 적합한 건축의 차별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모더니즘 건축의 리더였던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은 빌라사보아를 보면 추상화가 무엇인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전의 바로크나 로코코 등 이런저런 장식이 많은 건축과 비교하면 실내도 외관도 새하얗고 매끄러운 빌라사보아가 얼마나 새롭게 느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안그라픽스]
빌라사보아
르 코르뷔지에는 1931년 프랑스 파리 교외에 빌라사보아를 지었다. 1층에 필로티 넣어 한층 띄운 주택은 획기적이었고, 20세기 주택건축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건물로서 걸작인진 몰라도, 사는 사람에게는 여간 불편한 곳이 아니다. 일본의 노출 콘크리트 대가 안도 다다오 역시, 사는 사람에게 불편을 요구하지만, 나는 그것이 건축의 본질과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빌라사보아는 파리 교외에 있는 아름다운 녹지에 놓인 단독주택입니다. 코르뷔지에는 거기에 '필로티pilotis'라는 가는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현대적인 주택을 만들었습니다. 빌라사보아는 대지의 습도가 높아서 고상식高床式으로 집을 위로 올리는 편이 좋았다는 게 그의 이론이었지만 현지에 가면 거짓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빌라사보아는 예산 초과와 불편한 환경으로 나중에 여러 문제가 일어나, 시공주가 건축가를 고소했습니다. 재판에서 코르뷔지에는 친구였던 아인슈타인을 대동하고 나와 "그 대단한 아인슈타인도 칭찬했다."라며 열심히 항변했는데, 부탁을 받은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화가 치밀었을 겁니다. 굳이 힘을 들여 집을 띄우기보다 주변의 푸른 녹음을 그대로 활용해 지면에 세우면 훨씬 좋은 집을 싸게 지을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요.
나중에 코르뷔지에는 이 필로티를 사용한 건축기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빌라사보아는 20세기 주택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일컬어졌습니다. 19세기까지 특권계급에만 허용된 건축에서 장식을 빼서 시민 개인에 가까운 장소로 건축을 가져온 것은 그야말로 코르뷔지에의 업적인데, 빌라사보아에 부여된 평가는 좀 더 다른 의미를 가지며 이것이야말로 20세기라는 시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20세기란 장소와 건축을 분리한다는 주제가 건축계를 지배했던 시기였습니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구마 겐고 씀, 안그라픽스]
르 코르뷔지에에게 영향을 받은 한국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거장이다. 우리나라에서 누가 영향을 받았을까? 아주 직접적으로 받은 사람이 있다. 바로 김중업. 그는 훤칠한 키에 좋은 인상을 가진 멋쟁이였다고 한다. 김중업은 베니스에서 열리는 예술가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선정되어 참석하였고 만남을 고대하던 르 꼬르뷔지에를 만났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에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사무실에서 3년간 일했다. 고생은 많았지만, 거장의 영향을 직접 받아와 한국으로 전파하였다고 한다. (출처 : 박병주 교수)
르 코르뷔지에 평가
근대 도시계획의 전통 확립에 큰 계기를 마련한 르 코르뷔지에의 기계적인 도시관은 도시에서 생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능적인 존재로만 간주함으로써 1960년대 들어 사람과 함께 생활 부재의 도시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후 공급자 중심의 도시 만들기를 반성하고 생활자 관점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선진국의 노력은 1970년대 일본의 마치즈쿠리, 1980년대 미국의 뉴 어버니즘, 1990년대 영국의 어번 빌리지로 발전해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왔다. 이들 이론의 공통원리는 사람 중심의 도시로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정주 환경을 만들고, 커뮤니티를 통한 유대감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공간에 투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를 걷다, 이훈길, 안그라픽스]
그에게 바쳐진 장례식 추모사
번외 : 르 코르뷔지에의 회화
2016년~2017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르 코르뷔지에 전시회가 열렸다. 그간 잘 소개되지 않았던 화가로서의 면모에 집중한 전시회였다. 휴대폰으로는 촬영이 허용된 전시회였다.
르 코르뷔지에는 평생 그림을 그렸다. 오전 중에 자택에서 그림을 그리고 오후에 아틀리에로 나가 건축설계를 했다. 그림은 불순물이 없는 세상으로 느껴져 르 코르뷔지에를 치유해 주고 격려해 주었을 것이다. 또 르 코르뷔지에는 책도 많이 썼고,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비평가였던 폴 발레리도 르 코르뷔지에의 문장을 높이 평가했다.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
2013.0625. 펴냄
2014.1230. 더함
2015.0310. 더함
2016.0327. 더함
2016.1225. 더함
2023.0223. 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