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대의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보석 중의 하나인 네르발의 <실비>는 노래 부르기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너무나도 복잡하게 조화를 이룬 구조로 되어 있어서 단지 다시 읽어 볼 수 있을 뿐, 계명 창법으로 기억할 수는 없다. 비발디는 노래 부르기 쉽지만 드뷔시는 그렇지 않다.
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열린책들
이에 달린 옮긴이(김운찬)의 주석
- 네르발(1808~1855)의 소설 <실비> (1853)는 에코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으로 이 작품에 대해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글을 썼다. 이 작품에 대한 에코의 최종적인 종합으로는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 (열린책들, 2009)에 실린 <발루아의 안개> 참조.
움베르토 에코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라는데 읽지 않을 수 없다. 찾아봤다. 번역본이 있다. 1997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최애리'씨 번역으로 <실비/오렐리아>가 나왔는데 절판. 신아사, 정우사에서 출간된 책도 절판. 2012년 이준섭 번역으로 지만지에서 나온 책도 절판.
기다리다 구했다. 지만지에서 나온 초록 장정의 책이다.
그 도입부
나는 어느 극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매일 저녁 나는 구애자다운 성장을 하고 무대 앞 칸막이 좌석에 나타나는 것이 상례였다. 때로는 모든 것이 충만해 있었고, 때로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었다. 겨우 삼십여 명의 연극 애호가연하는 자들이 메우고 있는 일층 뒷좌석이나 챙 없는 모자를 쓰고 구식 치장을 한 사람들이 차 있는 칸막이 좌석을 바라본들, 화사한 옷차림과 번쩍이는 보석, 환한 얼굴들이 층층을 메우고 웅성거리며 생기 넘치는 관중석의 분위기에 젖어본들, 내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실내의 광경에는 무관심하였고 연극도 거의 내 마음을 끌지 못했다. 다만 그 당시 걸작이라는 한 지루한 작품의 제2장이나 3장에서는 예외였다. 아주 낯익은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 텅 빈 공간을 비쳐주고, 나를 둘러싼 이 공허한 얼굴들에게 한 번의 숨결과 한마디 말로 활기를 불어넣을 때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제라르 드 네르발, <실비 / 산책과 추억>, 이준섭, 지만지고전천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