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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넷플릭스, 오스만 제국의 꿈

_물곰 2020. 11. 19.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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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다룬 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

2020년 1월 24일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드라마 + 다큐 구성이다. 드라마 중간중간 전문가들 인터뷰가 들어간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는 <로마 시리즈>에서 먼저 보여준 스타일이며,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라스푸틴을 다룬 <마지막 차르>라는 작품도 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쟁은 세계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전략적으로 의미가 큰 전쟁은 아니라 평가받는다. 오스만 왕조는 콘스탄티노플만 함락하지 않았지 이미 그 주변을 함락했으며, 주변을 돌아 동유럽으로 진출해 있었다. 그러나 천여년간 지속되어 온 콘스탄티노플을 이슬람 세력에서 점령하는 것은 여러모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배경이 되는 이야기

오스만 제국

1258년에 태어난 오스만은 아나톨리아 지역에 에미리트를 세웠다. 에미리트는 '아랍에미리트'라 부를 때 들어가는 에미리트다. 중세에는 수백개의 아랍 교단이 퍼져나갔다. 이러한 가지 교단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하면, 수장은 '에미르(아미르)'가 되었고, 그들의 작은 나라는 '에미리트'가 되었다.

오스만이 세운 것은 하나의 에미리트였고, 그의 후손들이 강대한 제국으로 만든다. 유럽인들은 오스만을 '오토만'이라 발음했다.

 

어머니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호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1편에서 잠깐 나오고 역사학자들의 설명도 있다. 설명을 잠시 보자.

신임 술탄 메메드 2세의 나이는 이제 겨우 19살이었다. 그는 1432년 3월 30일 아드리아노플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했다. 모친 후마 하툰은 투르크족이었음이 거의 확실한 노예 여성이었다. 그러나 메메드의 부추김도 조금은 받아가면서 만들어진 후일의 전설은, 그녀를 프랑크족의 고귀한 집안 태생으로 둔갑시켰다.

 

아버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는 오스만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무척이나 호전적인 인물이다. 아버지는 중간 중간 나오는데 어떤 인물인지 보자.

메메드 부친은 귀족집안 출신인 다른 부인들의 아들만 편애하고 그에게는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을 모친과 다에 하툰으로 알려진 독실하고 자존심 강한 투르크족 유모와 함께 아드리아노플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맏형 아흐메드가 1437년 아마시아에서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둘째형 알라 앗 딘도 6년 뒤 같은 도시에서 불가사의하게 살해되었다. 메메드는 11살의 나이에 제위 계승자 겸 오스만 왕조에 생존해 있는 유일한 왕자가 되었다. 그밖에는 무라드 본인과, 전 술탄 쉴레이만의 손자이자 현 술탄의 먼 사촌으로 콘스탄티노플에 망명해 있는 오르한이 있었을 뿐이다.

 

할릴 파샤

무라드 2세는 아들 12살인 메메드 2세에게 술탄 자리를 물려준다.
그러나 곧 재상 할릴 파샤가 무라드 2세를 다시 부른다. 첫번째는 페르시아 탁발승 때문이었고, 두번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알바니아와 그리스 국경에서 전쟁이 벌어졌는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는 메메드의 현실성 없는 계획을 그의 보호자들이 거부하자 메메드가 격노한 것이다. 그의 오만하고 냉담한 태도는 궁정과 대중의 기분 모두를 상하게 했다. 그런데 가장 불만을 드러낸 곳은 군대였다. 할릴은 공개적으로 군사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무라드 2세에게 아드리아노플로 돌아와 정권을 다시 잡아줄 것을 간청했다.

 

우르반

메흐메트는 헝가리 기술자 우르반에게 대형 대포를 만들라고 한다. 

일명 바실릭이라고 불린 그 대포는 550킬로그램짜리 화강암을 1,500미터 멀리까지 발사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대포에 금이 가고 폭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메흐메트가 다치는 장면이야 꾸며낸 장면이겠지만, 실제로 대포 때문에 많이 다치고 죽었다고 한다.

포탄을 장전하려면 세 시간이 넘게 걸렸으며 발사를 할 때마다 반동이 정말 심해서 대포 앞에 있는 사람보다 뒤에 있는 사람을 더 많이 죽일 지경이었다.

*인용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콘스탄티노플은 정말 문 하나를 잠그지 않아 점령되었나?

역사적으로 그렇게 설명되고 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세 번째 성벽이자 가장 난공불락인 성벽 한쪽의 쪽문을 누군가가 잊고 잠그지 않는 바람에 그 전투는 결론이 났다. 튀르크인 몇 명이 들어가서 그 구역을 확보한 다음 군대가 들어올 수 있게 더 큰 성문을 열었다. 그리하여 서방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제국의 견고한 수도가 일순간에 불길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주스티아니는 어떻게 되었나?

컬러빈 포로 근거리에서 발사한 포탄 하나가 주스티니아니를 맞추고 그의 흉갑을 뚫은 것은 해가 뜨기 바로 직전이었다. 피가 흥건히 흘렀으니 고통도 심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에게 싸움터에서 자신의 몸을 빼내달라고 부탁했다. 부하 한 명이 내벽으로 이어지는 쪽문 열쇠를 얻기 위해 인근에서 싸우고 있는 황제에게 갔다. 콘스탄티노스는 급히 주스티니아니에게로 달려와, 그에게 자리를 계속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주스티니아니의 담력은 이미 다 떨어진 상태였다. 문은 열렸고 호위병은 도시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항구로 가 제노바인의 한 선박에 그를 내려놓았다.


드라마에서는 주스티니아니가 전쟁터를 떠나고 머지 않아 숨졌다고 간략하게 나온다. 전쟁터를 떠난 주스티나아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골든 혼을 용케 빠져나간 배들 중에는 부상당한 주스티니아니를 태우고 간 문제의 제노바 갤리선도 끼여 있었다. 그는 키오스 섬에 닿은지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과 베네치아인에게는 포위전 내내 그가 보여준 에너지와 기개, 지도력은 찬탄의 대상이었으나, 결국엔 도망자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주하여 방어력 전체를 붕괴시킬 게 아니라 고통과 죽음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 제노바인들까지 그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꼈다. 대주교 레오나르드도 적절치 못한 시기에 공포심을 느낀 그를 통렬히 비난했다.

 

 

 

같이 볼 책

<오스만 제국의 꿈>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며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과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같이 보았다. 드라마와 같이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

 

 

광범위한 정치 분야에서조차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영향은 지극히 미미했다.투르크족은 이미 도나우 강가에 닿아 중부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운이 다했다는 것, 또 기껏 쇠락해가는 도시 하나에 불과한 제국이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에 거대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 제국을 상대로 끝까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일이었다. 물론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기독교계가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오직 로마 교황만이 진정으로 당황했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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