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Books

프란츠 카프카의 글쓰기

_물곰 2016. 8. 1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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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카프카의 글쓰기 환경은 지독하게 열악했다. 그는 낮에 일했고, 밤에 글을 썼다. 

부모, 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 좁아터진 아파트에서. 그래도 그는 글을 썼다. 그토록 무서워하던 아버지를 마주하며. 


글을 쓰고 싶은데 앞머리가 끊임없이 흔들린다. 나는 아파트 전체의 소음 본부라 할 수 있는 내 방에 앉아 있다. 여기저기에서 문이 쾅쾅 열렸다 닫히고... 아버지는 내 방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목욕 가운 자락을 질질 끌며 들어온다. 현관 쪽에서 아버지가 모자를 솔질해 놓았냐고 외쳐 묻는 소리가 마치 파리의 어느 길 건너편에 대고 외치는 소리처럼 요란하다. 현관문은 후두염에 걸린 사람처럼 꺽꺽거리는 소리를 낸다... 마침내 아버지가 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조금 부드럽기는 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는 카나리아 두 마리의 울음소리 뿐이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쓰기 위해 존재했다. 


글쓰기는... 죽음보다 깊은 잠이다... 그 누구도 무덤에서 시신을 끌어내지 않듯이 밤에는 책상에서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나는 카프카를 너무나 연약하고 상처깊은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직접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일을 어머니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편지를 읽고, 아버지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프카에게 그 편지를 돌려주었다. 



불면증


잠 없는 밤. 벌써 사흘째나 이어지는 중이다. 잠이 쉽게 들지만, 한 시간 후쯤, 마치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뉜 것처럼 잠이 깨버린다... 이제부터 대략 새벽 5시까지, 밤새도록, 비록 잠이 든다 해도 너무나 강력한 꿈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시에 의식이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형식적으로야 내 육신과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자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동안 꿈으로나 자신을 쉴 새 없이 두들겨대야만 하는 것이다. 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꿀 뿐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 나는 밤새도록, 건강한 사람이라면 잠들기 직전에 잠시 느끼는 그런 혼몽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

(일기, 1911. 10. 2. KKAT 49f.)


[프란츠 카프카 꿈], 배수아 옮김, workroom


'머리를 잘못된 구멍에 갖다 뉘다'는, 무슨 말일까.



프란츠 카프카와 헤르만 헤세


김누리 중앙대 교수가 쓴 한겨레 사설을 읽다가 카프카와 헤세의 글을 비교하는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공감하는 내용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문장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오히려 차갑고, 건조하고, 때론 투박하다. 아름답기로 치면 헤르만 헤세의 문체를 따를 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카프카를 더 위대한 작가로 평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과 시대를 더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잠자가 ‘벌레’로 변신할 때, 헤세의 싱클레어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변신>과 <데미안>의 문학적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미문이 아니라 성찰의 깊이다. 카프카는 현대인의 실존을 ‘벌레’라는 이미지로 포착했고, 헤세는 여전히 18세기 이상적 휴머니즘의 인간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카프카의 말처럼 문학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부수는 한 자루 도끼”와 같은 것이지,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언어의 정원이 아니다.


원문 : http://www.hani.co.kr/arti//697817.html




2013.0721. 펴냄

2016.0529. 더함

2016.0813. 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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