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를 읽다가 관심이 생겨 러시아 역사를 살펴 보았다.
안나 카레니나는 1870년대에 쓰여진 작품으로 1870년대의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쟁과 평화는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크림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1860년대에 쓰여져 출간되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마지막 차르>는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에 관한 드라마+다큐 이다. 니콜라이 2세는 1868년 생으로 재임기간은 1894년부터 1917년이다.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1894년 11월 1일 - 1917년 3월 14일)이다. 본명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러시아어: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생으로 1910년까지 생존했으니 니콜라이 2세의 집권 시기까지 살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조금 더 빨라 1821년에 태어나 1881년까지 살았으니 니콜라이 2세를 보지는 못했다. 니콜라이 2세의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3세(재임기간 1881년 3월 14일~1894년 11월 1일)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1818년~1881년)과 대부분 겹친다. 알렉산드르 3세는 1881년 3월 13일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달 앞서 병으로 사망했다.
차르가 된다는 건 야전사령관, 황제, 총리, 교황이 되는 걸 의미한다.
로마노프 왕가는 300년 가까이 러시아를 통치했다.
로마노프 왕가에 대한 책을 찾고 싶은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은 거의 없다.
출판사 책소개
기존의 문화사들과 달리 동시대인들의 일기, 편지, 메모, 증언, 회고 등 문화사에서 제외된 수많은 자료와 기록들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러시아 문화사를 구술사적 시각으로 재구성한 책이다. 저자는 일반적인 문화사 기술과 같이 연도별, 작품별, 사건별 기술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제정 러시아의 문화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 역사적 순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정 러시아 문화의 초석을 놓은 푸쉬킨,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글린카, 차이콥스키, 이동파 화가들, 브률로프, 이바노프 등 많은 예술가들이 신화화되고 공식화되는 동안 문화 권력에 의해 묻혀지거나 혹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과 그 원인 그리고 예술가들과 권력 사이의 대립과 협력의 관계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다.
목차는 흥미로워 보인다.
1부
1장_ 최초의 로마노프 차르들: 차르 미하일에서 표트르 대제까지 21
2장_ 칸테미르, 로모노소프, 바르코프 55
3장_ 예카테리나 2세와 그 시대의 문화 73
2부
4장_ 파벨 1세와 알렉산드르 1세: 카람진과 쥬콥스키 103
5장_ 알렉산드르 1세, 쥬콥스키, 젊은 푸쉬킨 129
6장_ 니콜라이 1세와 푸쉬킨 170
3부
7장_ 레르몬토프와 브률로프 213
8장_고골, 이바노프, 츄체프, 니콜라이 1세 시대의 종말 245
4부
9장_ 알렉산드르 2세, 투르게네프와 도스토옙스키 287
10장_ 게르첸, 레프 톨스토이, 그리고 여성 문제 312
11장_ 차이콥스키와 러시아 제국에서의 동성애 340
5부
12장_ 도스토옙스키와 로마노프 황실 365
13장_ 알렉산드르 3세, 이동전시파, 무소르그스키 392
14장_ 문화 애호가 니콜라이 2세와 레닌 423
1894년 니콜라이2세가 26세의 나이로 차르(황제)가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우리나라에 큰 사건을 하나 기록하게 되는데, 바로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벌어진 러일전쟁이었다.
러일 전쟁은 1904년 2월 8일에 발발하여 1905년 가을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려는 무력 충돌이었다. 러일 전쟁의 주요 무대는 만주 남부, 특히 요동 반도와 한반도 근해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제국이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부동항으로, 여름에 주로 이용되었으며 여순 항(당시는 Port Arthur)은 연중 사용할 수 있었다. 청일 전쟁 이후인 1903년 8월에 진행되기 시작한 차르 정부와 일본 간 협상에서 일본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이를 거부하고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으로 하는 분할 통치안을 역제안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일본은 1904년 협상 결렬 후 러시아가 향후 전략적 이익을 위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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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끝나는데, 러시아 제국이 믿었던 발트해 함대가 해전에서 궤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대마도 해전, 쓰시마 해전이라 불리는 전투였다.
발트해 함대가 수개월에 걸쳐 일본까지 갔으나 허망하게 궤멸하며 러일전쟁은 끝나게 된다.
니콜라이2세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다)는 자녀로 4녀를 낳은 뒤,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다. 알렉세이는 빅토리아 여왕에서 이어진 유전질환, 혈우병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불운은 '라스푸틴'이라는 더 큰 재앙을 몰고 오게 된다.
라스푸틴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자면 '신돈'을 떠오르게 하는 인물이다. 공민왕 시대 고려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신돈처럼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를 멸망으로 이끄는데 역할을 한다.
알렉세이는 그의 외증조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으로 인해 선천적인 혈우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헤센의 알릭스는 혈우병 보인자였다. (2009년 유전분석으로 인해 그는 혈우병 B에 의해 고통받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그는 혈액 응고 요소가 선척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늘 자신을 위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그의 죽음을 초래했는데,그의 병을 위해 수도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그를 치료한다고 주장하며 나섰기 때문이다. 라스푸틴은 알렉세이 황태자가 사경을 헤맬 때 그를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가 최면, 허브를 사용하고 의사들이 너무 많은 치료를 하지 않도록 조언했다는 것이다. 다른 믿음으로는 그가 정말로 초월적인 힘을 가져 알렉세이를 치료했다는 것과 신에게 기도했다는 것이다. 알렉세이와 그의 누나들은 라스푸틴을 '우리의 친구'로 배우며 그를 신뢰했다.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훗날 2월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피의 일요일을 계기로 로마노프 왕가는 민중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게 된다. 혁명을 원하는 정치 단체들은 더욱 과격해지고, 폭력적이 된다.
1905년 1월 22일, 여느 때라면 성당에 갈 시간에 굶주림에 지친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황제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성가를 부르며 눈길을 걸어 황궁으로 갔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이콘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림. 1905년 니콜라이2세가 시위대를 피해 떠난 겨울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