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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조영학, 여백을 번역하라

_물곰 2019. 12. 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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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서 원저자는 갑이고 역자는 을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원저자의 발언권은 이미 끝나고 횡포를 부리는 것은 역자다. 어느 교수가 그래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 했는데, 부처님 살찌고 여위긴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는 말도 있다.


황현산 선생이 번역에 대해 한 말이다.
재미있는 말이다.

 

 

앞서 번역에 관한 황현산 선생의 트윗을 언급했다. 이번에는 장르 소설 번역가 조영학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내 주장의 핵심은 바로 번역은 '다시 쓰기(rewriting)'라는 얘기다. 외국어 텍스트의 내용(의미, 형식, 상황, 비유 등)을 먼저 파악하고, 그 결과를 우리말로 다시 쓰는 과저잉라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이른바 '번역'해야 할 대상이 단어, 구문이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가 되므로 번역 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번역 텍스트가 외국어 텍스트에서 상대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 경우 궁극적으로 번역 교육은 외국어 교육이 아니라 우리말 교육이자 글쓰기 교육이 된다.

 

2

"They are an easy people to love"는 열이면 열 "그들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로 번역해온다. 이 문장에서 'people'은 관사 'an'이 있으므로 '사람들이'이 아니라 '민족'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번역기 테스트
구글 : 그들은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파파고 : 그들은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카카오 : 그들은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이다.

 

해군 관련 구문에서 'sailor'가 나오면 어떻게든 검색을 해서 '수병' 관련 계급을 찾아내길 바란다. 그런데도 대개는 조사하거나 찾아보는 대신 '선원'이라고 나태한 번역을 내밀고 만다. 번역가의 최대 적인 무지가 아니라 게으름이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 검색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번역기 중에선 그나마 구글 번역기가 가장 폭넓은 단어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구글 번역기

 

 

판매 인세가 아니라 일시불 지급인 매절로 계약할 때 번역료는 대체로 3,500~4,500원 선이다. 말인즉슨 연봉 4,000만 원 정도를 기대한다면 검토, 검색, 교정 등을 포함해서 매달 1,000매 정도를 꾸준히 번역해야 한다는 얘기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 동료 번역가들을 보더라도 500~600매가 대부분인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번역가의 평균연봉은(꾸준히 작업할 때) 겨우 2,000~2,500만 원 정도다. 혼자 산다면 모를까 가정을 꾸리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처지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다.


번역가로 사는 삶은 팍팍하다. 출판 업계에 있는 곳 치고 팍팍하지 않은 곳이 없다. 작가면 작가, 출판사면 출판사, 서점이면 서점. 

 

 

2017년 2월 17일, 세종대학교에서 기계번역기와 인간번역가의 번역 대결이 있었다. 번역가 네 명과 구글번역기, 네이버번역기 파파고, 시스트라는 번역기가 기술 영역, 비즈니스 영역, 시사 영역 세 분야에 걸쳐 경쟁을 벌였다. 결과는 기계번역기의 참패였다. 속도를 제외한다면, 기계번역은 문장 하나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완성도 95퍼센트는커녕 30~40퍼센트가 고작이었다.


번역기를 쓰곤 하지만, 결과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 언제쯤 쓸 만한 번역을 얻게 될까.

 

 

3
놀 준비는 된 거냐, 찐따?
니미, 그걸 말이라고 씨부려?
거스, 저 병신새끼 봤냐?
저 씹새, 엉덩이를 발라버려.

대체 이 냥반은
무슨 한이 그리도 맺히셨길래
이리도 욕지거리에
서슴이 없으시뇨....

오래전 동료 번역가가 내 번역서 <스트레인>을 읽다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줄기차게 이어지는 비속어와 욕설에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만 것이다. '욕쟁이 번역가', 범죄소설과 탐정소설을 주로 번역하던 시절 독자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조영학 번역가가 쓴 책, <여백을 번역하라> 소설 번역을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나간다.

 

4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He has sensitive and almost sad eyes.


이 문장을 한번 번역해보자.

직역하자면, '그는 섬세하고 무척 슬픈 눈을 가졌다.' 정도이다.

이번에는 조영학 번역가의 번역을 보자.

영어는 형용사+명사 구조를 즐겨 사용하지만 우리말은 부사어, 명사+서술어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I have a good memory"는 "나는 좋은 기억력을 가졌다"가 아니라 "나는 기억력이 좋다" 정도가 좋다.

그래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의 눈은 섬세하면서도 무척 슬퍼 보인다. 

 

다음의 문장을 번역해보자

we tend to forget that happiness doesn't come as a result of getting something we don't have, but rather of recognizing and appreciating what we do have.


영어 단어들을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번역이 된다.

행복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을 소유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것을 인식하고 감사하는 것에서 온다라는 것을 잊는 경향이 있다.


나라면 어떻게 번역할까. 최선을 다해 번역해보면 이렇다.
행복은 없는 무언가를 얻는 데서 오는 게 아니라 있는 걸 깨닫고 감사하는 데서 온다는 걸 우리는 잊곤 한다. 

이제 조영학의 번역을 보자.

종종 잊고 살지만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뭔가 새로운 것을 얻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도 뭔가 있음을 깨닫고 고마워하기 때문이다.


번역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른 문장을 살펴보자.

Many people had little choice but to pay up.

많은 사람이 돈을 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많은 사람이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

등과 같이 번역된다.

조영학 번역가의 번역을 보자.

우리말 부사어 표현을 활용하면 문장도 가독성도 좋아진다. 번역은 글뜻뿐 아니라 글맛, 글멋까지 옮겨야 한다. 두 번째 문장은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보다는 상황과 문맥에 따라 '울며 겨자 먹기로', '눈물을 머금고', '피눈물을 삼키며', '어쩔 수 없이' 등으로 바꾸면 문장이 훨씬 탄탄해진다.


그래서.
Many people had little choice but to pay up.

다들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지불했다.


어떤가? 훨씬 글맛이 있지 않은가.

 

기계적인 번역을 하지 않기 위해.
다음의 문장을 한번 고민해보자.

The marvelous thing is that it's painless.

소설 <킬라만자로의 눈> 도입부인데 역자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놀라운 건 고통이 없다는 거다."

번역가를 인터뷰한 기자는 시험삼아 이렇게 번역했다.
"통증이 없다는 게 놀라운 거다."

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듯하다.
"고통이 없다는 게 놀랍다." 정도.

조영학 번역가는 이렇게 번역한다.

놀랍게도 아프지 않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조영학 번역가 후배는 번역을 조금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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